국보 '세한도'의 기부자 손창근 씨가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95세. 지난 6월 11일 별세했지만,
'세한도'를 기증받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도 알지 못했다. 뒤늦게 소식을 전해 들은 박물관
측은 당혹해했다. 담당자는 "'세한도' 기증하실 때도 아무 말씀 없으시더니…. 20년 근무에
이런 일은 처음"이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차남 손성규 연세대 교수는 "아버지께서 특히
박물관.산림청에 알리지 말라 당부했다"며 "뜻에 따라 조용히 가족장으로 치렀다"고만 했다.
손 씨는 1929년 개성에서 태어났다. 1953년 서울대 섬유공학과 졸업 후 공군에서 예편했다.
1960년대 스위스 상사에서 여러 해 일한 뒤 부친과 사업을 이어갔다.
그는 '세한도'의 기증으로 2020년 문화훈장 최고 영예인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문화유산 보호 유공자 포상을 시작한 이래 금관문화훈장 수훈은 그가 처음이었다.
사실 '세한도'는 그의 마지막 기증품이다. 팔순이 되던 2008년 국립중앙박물관회에 연구
기금으로 1억원을 기부했다. 2012년에는 경기도 용인의 산림 약 200만 평(서울 남산의
2배 면적)을 국가에 기증했다. 50년 동안 잣나무ㆍ낙엽송 200만 그루를 심어 가꿔오던
시가 1천억원 땅이었다. 2017년에는 연고가 없는 KAIST에 50억 원 상당의 건물과
1억 원을 기부했다.
2018년, 구순을 맞아 『용비어천가』 초간본(1447)부터 추사의 난초 걸작 '불이선란도'까지
304점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박물관은 이를 기려 손세기ㆍ손창근 기념실을
마련했다. 추사 김정희를 중심으로 그와 교류했거나 영향을 받은 제자들의 작품까지
함께 모은 컬렉션이었다. 손창근 씨는 이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람들 앞에서
기증의 소회를 밝혔다.
"한 점 한 점 정(情)도 있고, 애착이 가는 물건들입니다. 죽을 때 가져갈 수도 없고 고민
고민 생각하다가 박물관에 맡기기로 했습니다. 손 아무개 기증이라고 붙여주세요.
나는 그것으로 만족하고 감사합니다."
인터뷰도 한사코 마다했다. 마지막까지 남겨둔 세한도'를 기증하기로 결단한 것은
그로부터 1년 2개월 뒤였다.
대를 이은 기부였다. 개성에서 인삼재배와 무역을 하다 월남한 부친 손세기씨는 칠순을 앞둔
1973년, 당시 박물관이 없던 서강대에 보물 '양사언 초서'를 비롯해 정선ㆍ심사정ㆍ김홍도
등 고서화 200점을 기증했다. 기증서에 이렇게 남겼다.
"우리의 선조께서 물려주신 유품들을 영구보존 하여주시고 귀교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이
박물관을 통해 우리의 옛 문화를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되게 하여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여러 차례 기부를 이어갔음에도 드러내기를 꺼렸다. 금관문화훈장 수훈 때도 자녀들만
대신 보냈다. 영상으로 전한 메시지에는 딱 한마디만 했다. “감사합니다."
용인 땅 기부 때는 더했다. 약속 없이 대리인만 보냈기에 산림청 직원들은 그의 얼굴도 몰랐다.
“수도권 지역의 끈질긴 개발 유혹을 뿌리치기 위해 재산을 국가에 기부하기로 결심했다”며
신상을 공개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 기부를 알리는 것도 사회 기여라는 설득에 손 씨는
"자녀들도 내 뜻에 선뜻 동의했다는 것만 알려달라"고 당부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올 초 기증실을 개편하고 지난달까지 '세한도'를 특별전시했다. 손 씨는
이때도 나타나지 않았다. 아끼던 유물들이 기증돼있는 박물관이었지만 2020년 이후
발길도 하지 않았다.
국보 '세한도'는 15m 두루마리 대작이다. 추사가 1844년 그린 그림에 청나라 명사 16명이
쓴 감상문, 오세창ㆍ정인보 등 우리 문인들의 글이 붙어 길어졌다. 그림 오른쪽 아래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는 의미의 '장무상망'인이 찍혀 있다.
조용한 기부에 이은 조용한 죽음, 오래도록 잊지 말아야 할 귀한 가치를
세상에 남기고 손창근 씨는 떠났다.
- 작성자 이동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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