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이십사년 구월십구일 박동선씨가 죽었다는 작은 기사가 났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드물 것이다. 언론의 외신을 통해 본 그에 대한 인상은 좋지 않았다.
언론이 만들어 준 어두운 그림자 때문인지도 모른다.
천구백칠십육년 시월십오일 워싱톤 포스트가 한국인 박동선이라는 인물이 미국
의회 의원들에게 뇌물을 제공한 사건을 터뜨렸다. 박동선이라는 한국인이
하원의 해너, 패스먼, 아다보, 레게르, 레디거등 이십명 이상의
의원에게 거액의달러를 건넸다는 내용이었다.
워싱톤 포스트는 박동선의 배경에 있는 한국 정보기관의 공작목적은 미국의 군사
경제원조의 계속, 주한 미군 유지에 있다고 했다. 워싱턴 포스트는 이런 사실들이
미국 정보기관이 한국의 청와대를 도청하는 과정에서 수집된 정보에 의해
밝혀졌다고 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미국의 의원들에게 뇌물을 주도록
직접 명령했다는 것이다.
왜 그런 사건이 터졌을까. 나는 관련된 자료를 본 적이 있었다. 천구백칠십년대로
접어들면서 미국은 주한 미군 감축, 군사지원삭감 쪽으로 정책 방향을 잡았다.
미국의 지원이 아직 절실했던 그때 한국으로서는 미국의 지도층이
한국을 따뜻한 눈으로 보게 할 필요가 있었다.
미국 의회나 정부 그리고 언론의 방향을 돌려야 했다. 당시 미국의 도움을 받는
여러 나라가 미국 정부각료나 의회 의원들에게 은밀히 로비를 하고 있었다.
한국도 미국시장에 물건을 팔아먹고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가만히 있기만 하면 안된다는 생각이었다.
한국 정보기관은 백악관과 미국 의회, 언론계에 접근할 능력이 있는 인물을 찾았다.
그런 일을 하기에 적합한 인물로 박동선이라는 재미 한국인이 선택됐다. 1962년
조지타운대학을 나온 그는 영어에 능통하고 백인사회에서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그 사회의 상류층 문화에 익숙했다. 품위 있게 치킨을 먹는 법을 숙달할 정도로
노력하는 성격이었다.
한국의 정보기관은 그에게 자금을 제공하기 위해 양곡 수입의 대리권을 주었다.
당시 한국은 해마다 막대한 미국 쌀을 수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동선은 조지타운 클럽을 만들어 백악관을 자주 드나드는 변호사 톰 코코란,
하원의원 존 부라드머스, 상원의원 조셉 몬다야등과 어울리며 정치헌금을 했다.
그는 조지타운에 고급클럽을 운영하면서 미국의 법무장관까지 불러
파티를 개최하기도 했다.
그런 사실들이 미국 정보기관의 한국 청와대 도청에 의해 노출이 된 것이다.
천구백칠십칠년 일월 카터 행정부가 출범했다. 미국 하원에서 프레이저 청문회가
열려 한미관계 전반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한국은 미국언론의 조롱거리가 됐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비서관들에게 이렇게 마음을 털어놓았다.
“돈을 먹었으면 미국 사람들이 먹었고, 돈을 먹은 놈들이 더러운 거지 왜 한국
정부를 공격하는 거야? 따지고 보면 미국의 신세지는 나라치고 워싱톤에
로비 안하는 나라가 어디있어? 아마 이스라엘이 제일 많이 할거야.
그래서인지 유태계 신문 뉴욕타임스는 아뭇소리 하지 않잖아. 지금 일본 정계를
떠들썩하게 하고 있는 록히드 사건도 그런 거래의 빙산 일각이 아니겠나?
미국과 일본간의 거래는 훨씬 크고 많을 게 아닌가 말이야.
미국이 주한미군 뺀다면서 겁을 주면 우리가 매달릴 줄 아는데 천만의 말씀이야.
미공군이야 빼가라고 해도 안 뺄거야. 자기네 방위 전력이기 때문이지. 지상군도
한국의 내정간섭을 하는 흥정거리로 삼겠다면 잘 가라고 하겠어.”
천구백칠십구년 유월이십구일 카터가 한국으로 왔다. 박정희 대통령은 카터에게
미군을 빼가려면 빼가라고 했다. 다만 무기와 장비는 남기고 가라고 했다.
그냥 주면 좋겠지만 돈을 달라면 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인권 문제에 관해서는 내가 먹여 살리는 내 국민이니 간섭하지 말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카터는 펄펄 뛰면서 화를 냈다. 카터가 간 후
박정희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미국의 압력에 절대 굽히지 않을 거야. 손톱도 안들어간다 는 걸 알면 미국도
버릇을 고치겠지. 나는 당대에 평가받으려는 게 아니야.
당대에 평가받으려면 일을 할 수가 없지.”
미국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당당한 대응에 박수를 치고 싶었다. 치사한
불법도청을 한 미국은 도덕적으로 법적으로 흠이 없는 것이었을까.
당시 한국은 미국의 주문을 받아 물건을 만들어야만 먹고 살 수 있는 나라였다.
정도 차이는 있지만 지금도 세계에서 주문이 들어오지 않으면
공장의 라인을 가동 시키기 힘들다.
박동선씨의 보이지 않는 공은 대단한 것 같다. 정보기관의 사람들은 그를
국가 최대의 안보 위기 상황에서 한국을 구한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음지에서 일한 그의 명복을 빈다.
-엄상익 변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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