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사 박문수(1691~1756)가 어명을 받들어 호남으로 암행을 나갔다.
한강을 건너기 위해 노량진 포구에 갔는데 사람이 많고 복잡했다.
그 중 유독 점쟁이 하나가 눈에 띄어 복채가 얼마인지
묻자 닷 냥씩이나 했다.
사기꾼이 아닌가 싶어 관찰하고 있는데 어떤 부인이 관상을 보러왔는데, 닷 냥이라는 큰
돈을 내고서 점을 보았다. 관상쟁이가 눈을 감고 글자중 하나를 찍어보라 하여, 부인은
한일자(一)를 찍었다. 찍고 나서는 집 나간 지 10년 된 남편의 생사를 알고 싶다고
하니 한일자가 누워있는 상이라 사람이 죽었으니 찾지 말라고 했다.
부인은 닷 냥이 아깝기도 하고 믿기지 않기도 해 다시 한 번 점을 보자고 하여, 이번에는
약(藥)자를 찍었다. “약자는 풀 초(草)변에 가운데 흰 백(白)자가 있고 양쪽에 실 사(絲)자가
있으며 아래에는 나무 목(木)자가 있는데, 목관(木棺)에다 실로 꽁꽁 묶은 백골을
넣었고 그 위에 풀이 난 것으로 보아 죽은 지 한참 되었다.”고 했다.
옆에 있던 박문수가 그럴 듯 해 보여 자신도 점을 쳐 보겠다고 했다. 그래서 점 복(卜)자를
찍었더니 점쟁이가 “어사님, 용서해주십시오”라고 하며 빌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글자풀이를 해보라고 하자, 사람이 서 있는데 점 하나를 찍은 것이 마패를
찬 암행어사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은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고 봉양(奉養)에 바치는 것이니 용서해 달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일단 그곳을 빠져나온 후 한 거지에게 좋은 옷을 입혀 그 관상쟁이를
찾아가게 했다. 실눈을 뜨고 점 복자를 찍으라고 시켜 거지가 그대로 하자
점쟁이가 단번에 걸인임을 맞추었다.
사람이 섰는데 암행어사는 그 점이 마패이고 거지는 바가지라는 것이었다.
이에 놀란 박문수는 그길로 영조대왕에게 달려가
이 관상쟁이에 대하여 보고를 드렸다.
그러자 영조대왕도 그 기이한 점쟁이에게 흥미가 생겨 얼마후 거지행색을 하고
수원 장날에 맞추어 그 점쟁이를 찾아갔다.
좌판 앞에서 점쟁이가 점을 치는 광경을 살피던 영조는 점쟁이가 미리 준비한 글자를
선택하지 않으면 못 맞출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영조는 점쟁이에게 자신은 배운게 없는 거지라서 아는 글자는 이것밖에
없다며 지팡이로 땅바닥에 한 一[일]자를 그었다.
그러자 한일자를 한참 응시하던 점쟁이는 갑자기 삼배를 올리며
"상감마마께서 어인일로 이 누추한 곳까지 행차를 하셨습니까"
라며 예를 올리는 것이었다.
영조대왕은 속으로 기겁을 하며 자신은 일개 거지에 불과한데
어째서 그런말을 하냐며 호통을 쳤다.
그러자 점쟁이는 "땅바닥에 지팡이로 한 一[일]자를 그으셨는데 땅은 土[토]이고 땅위에
한 一[일]자를 합하면 임금 王[왕]이 되지 않습니까?"라고 하는 것이었다.
영조대왕은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못하고 그 자리를 떠나 궁궐로 돌아왔다.
그리고 몇개월 후 영조는 자신과 연령이 비슷한 거지를 데려와 대감행색으로 변장케
하고 수십명의 하인들을 대동케하여 고관대작 행차를 만들었다.
그리고 수원남문 앞에 있는 점쟁이에게 점을 치러 가서 자신이 했던 것과
똑같이 땅바닥에 한 一[일]자를 그었다.
그러자 점쟁이는 한참동안 바닥을 응시하다가 "당신은 대감으로 변장을 하고는
있으나 일개 거지에 불과하다" 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거지가 어디서 그런 망말을 하냐며 호통을 쳤다.
그러자 점쟁이는 "당신이 땅바닥에 한 一[일]자로
누워 자는 사람이니 거지가 아니냐"라고 대답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영조대왕은 탄복해 마지 않으며 수원의 점쟁이를 한양으로
불러다가 국가의 대사를 앞두고 조언을 해주는 관상감으로
발탁하여 중용하였다고 한다.
(받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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