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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이육사(李陸史)의 생애

김정웅 2017. 8. 21. 13:23


독립운동가 이육사(李陸史)의 생애


이육사


1904년 4월4일(음) 경북 안동의 도산면 원천리 불미골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원록(源綠)이며, 별명은 원삼(源三) ,후에 활(活)로 개명하였다.


호인 육사(陸史)는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 형무소에
서 옥고를 치루었는데, 그때의 수인번호 二六四를 따서 지었다.


이육사는 항일운동가로서 활약이 두드러졌으며,
조국의 독립과 광복을 염원하는 시를 썼다.


퇴계 이황(退溪 李滉)의 14대손으로 아버지 가호(家鎬)와
의병장 凡山 許衡의 딸인, 어머니 허길(許吉) 사이에서
6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육사는 예안 보문의숙에서 신학문을 배웠고, 대구 교남학교에 잠시 다녔다.
1921년 안일양과 결혼한 뒤 1925년 형 원기(源琪), 동생 원유(源裕)와

함께항일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했으며,그 해 10월경

<의열단>의 임무를 받고 북경으로 건너갔다.


1926년 잠시 귀국해 일제에 억압받는 민족현실을 괴로워하다가
중국으로 가 북경사관학교에 입학해 군사훈련을 받았다.
1927년 국내에 들어왔다가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이후 10여 차례 투옥되었다.


1929년 출옥하자마자 중국으로 건너가 북경대학 사회학과에 적을 두고
만주와 중국을 돌아다니며 독립투쟁을 벌였다.1933년 귀국해

<신조선>사 등의 언론기관에 근무하면서 "육사"라는

필명으로 시를 발표했다.


1937년에는 신석초·윤곤강·김광균 등과 시동인지〈자오선〉을 펴냈다.
1941년에는 폐결핵으로 한동안 요양생활을 했다.


북경과 서울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다가 1943년 4월 서울에서 검거되어

경으로 압송되었고, 이듬해 1944.1.16 건강이 악화되어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북경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다.


일제 말기 대부분의 문인들이 변절하여 친일행위를 한 반면
그는 끝까지 민족적인 신념을 가지고 일제에 저항했다.


유해는 고향인 낙동강변에 안장되었고 1964년

경상북도 안동에 시비가 세워졌다.


(출처:네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