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사는 한평생 살아오며 남의 가슴에 못 한번 박은 적이 없고, 적선 쌓은 것을 펼쳐놓으면 아마도 만경창파 같은 들판을 덮고도 남을 정도였다. 그러다보니 선대로 부터 물려받은 그 많던 재산을 야금야금 팔아치워 겨우 제 식구들 굶기지 않을 정도의 중농 집안이 되었다. 정진사는 덕만 쌓은 것이 아니라, 학문이 깊고 붓을 잡고 휘갈기는 휘호는 천하 명필이었다. 고을 사또도 조정으로 보내는 서찰을 쓸때는 이방을 보낼 정도였다. 정진사네 사랑방엔 선비와 문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부인과 혼기 찬 딸 둘은 허구한 날 밥상, 술상을 차려 사랑방에 들락날락 하는 것이 일과였다. 어느 날, 오랜만에 허법스님이 찾아왔다. 잊을만하면 정진사를 찾아와 고담준론 (高談峻論)을 나누고, 바람처럼 사라지는 허법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