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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더한 수모도 겪었다… 회담장 박차고 나간 美에 결실 얻어내

김정웅 2025. 3. 4. 00:10

트럼프·젤렌스키 회담 파국에 재조명 받는 70년 전 韓美 회담

 

미국을 방문한 이승만(중절모 쓴 이) 대통령이 1954년 7월 26일 워싱턴DC 백악관에 
도착해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의 영접을 받고 있다. 왼쪽 위에 리처드 닉슨 
미 부통령이 보인다. 기둥 사이 군중의 모습에서 당시 이승만을 환영하는 
미 국민의 분위기를 알 수 있다./대통령기록실

 

1954년 7월 30일(현지 시각) 미국 워싱턴DC 백악관에서 있었던 이승만 대통령과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의 정상회담은 지난 28일의 트럼프·젤렌스키 회담보다 더 험악한 
분위기였다. 아이젠하워는 중간에 일어나 회담장을 나가 버렸고, 그가 돌아오자 이번엔 
이승만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러나 이승만은 그해 11월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정식 발효에 성공했고, 미국에 8억달러 원조를 받을 수 있었다. 무엇이 달랐던 것일까.

이승만은 7월 26일 워싱턴 내셔널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독설을 쏟아냈다. “워싱턴의 겁쟁이들 
때문에 한국은 통일되지 못하고 공산 세력의 위세만 과시해 줬다.” 30일 2차 정상회담을 1시간 
앞두고 미국 측이 내놓은 공동성명서 초안에 한일 국교 정상화 관련 내용이 들어있는 것을 본 
이승만은 대노했다. “이러면 만날 이유가 없지 않느냐”며 움직이려 하지 않자 
미국 측은 당황했다. 결국 정상회담은 6~7분 정도 늦게 시작됐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아이젠하워가 “왜 어제 중립국 감시위원단의 체코·폴란드 대표를 
내쫓았느냐”고 묻자 이승만은 “그들은 우리 군사 기밀을 정탐하는 스파이인데 미군이 
제공한 헬리콥터를 타고 다닌다”며 맞받았다. 아이젠하워는 깜짝 놀라 옆을 돌아보며 
“그게 사실이냐?”고 물었다.

이승만은 “한일회담의 일본 대표가 일본의 한국 통치가 유익했다는 등 망언을 했는데 그런 
일본과 어떻게 국교 정상화를 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아이젠하워가 “과거 일이야 어떻든 
국교 정상화는 꼭 필요하다”고 하자 이승만은 “내가 있는 한 일본과는 상종을 않겠다”고 
잘라 말했다.

그러자 아이젠하워가 화를 내며 벌떡 일어나 옆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 돌발 행동에 이승만은 
“저런 고얀 사람이 있나, 저런!”이라며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아이젠하워가 화를 삭이고 다시 
회담장으로 들어와 다른 문제를 토의하려 하자, 이번엔 이승만이 “내셔널 프레스클럽 연설 
준비 때문에 일찍 일어서야겠다”며 퇴장해 버렸다.

아이젠하워와 이승만의 갈등은 더 오래 전부터 벌어졌다. 6·25 전쟁 중 이승만의 계획은 북진 
통일로 전쟁을 끝내는 것이었고, 그걸 이루지 못하고 정전이 될 경우 미국과 방위 조약을 통해 
군사적 안전을 보장받는다는 ‘플랜 B’를 지니고 있었다. 반면 한국전의 조속한 종결을 공약으로 
내세워 1952년 11월 대통령에 당선된 아이젠하워의 생각은 달랐다. 그가 당선인 시절인 
1952년 12월 미군 시찰을 위해 방한했을 때 한국 대통령을 만날 계획은 없었으나, 이승만은 
그를 환영 행사에 초청하고 “오지 않는다면 한국에 무례하다는 것을 세계에 공표할 것”이라고 
압박해 경무대에서 만날 수 있었다.

 

 


1953년 아이젠하워 정부는 ‘통일 없는 휴전’을 반대한 이승만에 맞서 그를 정부에서 축출하려는 
‘에버레디 작전’을 세웠다. 그러나 이승만은 그해 6월 미국과 상의 없이 반공 포로 석방을 
단행했다. 휴전회담이 결렬로 갈 수 있는 대사건이었다. 아이젠하워가 훗날 ‘임기 8년 동안 
유일하게 자다가 깬 사건’이라 회고할 만큼 미국의 충격은 컸다. 특사로 파견된 월터 로버트슨 
미 국무성 차관보가 이승만을 만나 18일 동안 회담한 끝에 ‘한미상호방위조약과 경제적 원조를 
조건으로 휴전에 동의’하는 데 합의했다. 7월 27일 정전협정이, 
10월 1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됐다.

당시 이승만의 상황은 지금의 젤렌스키보다 열악했다. 3년 동안의 전쟁으로 국토는 폐허가 됐고, 
한반도에는 변변한 산업이나 희토류 같은 부존자원도 없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두 장의 카드를 
지니고 있었다. 하나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던 ‘북진 통일론’이었고, 
다른 하나는 ‘여론 호소전’이었다.

이승만은 1954년 7월 28일 미국 상·하원 합동 회의 연설에서 “죽음은 서울보다 워싱턴에 더 

접근해 오고 있다”는 등의 말로 33차례 박수를 받았고, 8월 2일 뉴욕시 주최 카 퍼레이드 

행사에서 ‘자유 수호의 영웅’으로 대접받으며 시민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당시 아시아의 공산화를 우려하는 미국 내 여론은 아이젠하워가 무시할 수 없는 규모였다. 

김명섭 연세대 교수는 “장제스(蔣介石)를 동정하며 ‘왜 공산화를 방치하나’라는 생각을 지닌 

미국 내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세력에게 이승만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고 했다.

이승만은 끝내 미국의 도움으로 북진 통일을 하는 데는 실패했으나, 군사적·경제적 지원을 

통해 한국이 안전하게 경제 성장을 이루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오영섭 명지대 

연구교수는 “이승만은 1950년대 냉전 체제에서 한국을 지키는 것이 결국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냉철한 판단하에 여론전을 펼쳐 외교적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

1953년 10월 1일 한국과 미국 사이에 조인됐고 1954년 11월 18일 발효된 조약. 이 조약을 
통해 한·미 관계는 동맹 수준으로 격상됐고, 휴전선 이남에 주한 미군이 주둔하게 됐다. 
이승만 대통령의 ‘북진 통일론’이 얻어낸 최대의 성과로 평가받는다.

(출처: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