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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 보수’ 에드먼드 버크에게 한국 보수의 길을 묻다

김정웅 2024. 4. 15. 20:02

에드먼드 버크

 

보수는 패배했다. 한국의 보수 진영은 국민들의 지지를 새로이 받기는커녕 
오히려 심판당했다. 보수의 앞길에는 길고 어두운 터널이 드리워져 있다. 
이제 보수는 어디로 가야 하나?

답답한 마음에 서재에 멍하니 앉아 있던 나는 불현듯 에드먼드 버크를 떠올렸다. 
프랑스 혁명 발발 직후 ‘프랑스 혁명에 대한 성찰’(1790)을 집필하여 혁명의 급진성을 
격렬하게 비판했던 근대 보수주의의 시조. 그에게 조언을 구해 보면 어떨까. 
서재 한편에 감춰진 비밀의 문을 열고 발길은 어느새 지하 세계로 향하고 있었다.

 

나: 선생님, 대학생 때 처음 뵈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습니다.

버크: 오랜만에 만나니 나도 반갑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 
        왜 그리 얼굴이 어두워?

나: 한국의 보수 우파가 걱정입니다. 이제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을 것 같아서요. 
     한국에서 80년대 이후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경험한 세대는 이제 40~50대가 
     되어 사회 주류가 됐습니다. 이들은 과거를 손쉽게 부정하려 하고, 합리적이기만 
     하면 뭐든 이룰 수 있다는 계몽주의적 경향이 강해 보입니다. 이들의 지지에 
     힘입어 한국판 ‘자코뱅’(프랑스 혁명 당시 급진주의자)들이 정치권에 입성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견제해오던 60대 이상은 그 수가 줄고 있고, 20~30대는 정치적 
     방향을 잃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요?

버크: 자네가 만약 나의 시대에서 교훈을 얻고자 한다면 우선 보수주의의 본질에서 
        출발해야 하지 않겠나? 내가 생각하는 보수의 본질은 두 가지라네. 
        하나는 전통과 역사 중시, 또 하나는 추상적 이론화에 대한 배격이지.

        보수주의자의 기질은 산전수전 다 겪어본 장사꾼과 비슷하다고 보면 되네. 
        세상 경험이 많은 사람들은 세상이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다는 것을 잘 알지. 
        책상머리에서 끄집어낸 숫자 몇 개로 세상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도.

보수에게는 당장 ‘멋진 신세계’를 보여주는 설계도 따윈 없을지 몰라. 
하지만 추상적 이론화보다 현실 속의 전통과 역사를 중시하는 보수주의에게는 
이론에 얽매이지 않고 시대 변화에 유연하게 적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 
유럽에서도 보수주의는 원래 대지주 귀족의 이해관계에서 출발했지. 하지만 
유럽의 보수는 진화했네. 모처럼 자네가 여기까지 날 찾아왔으니 나의 후예인 
영국 보수당이 어떻게 위기를 극복해 왔는지 설명해 주지.

영국 보수당은 일본 자민당과 함께 세계적으로 가장 성공적인 우파 정당에 속한다네.
지난 100년(1924~2024) 중 64년간 영국의 집권 여당은 보수당이었어. 하지만 영국 
보수당에도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야. 보수당이라는 당명으로 치른 1846년 
선거에서 보수당은 정권을 내주지. 그 후 28년 동안 4년 반을 제외하고 보수당은 
야당이었네. 그러다 1874년 보수당은 부활해. 그 후 1905년까지 31년 중 
23년간 집권당은 보수당이었네.

부활의 열쇠는 바로 벤저민 디즈레일리가 도입한 정당 개혁이었어. 1870년 
디즈레일리는 전문 당료들로 구성한 중앙당 조직(Conservative Central Office)을 
만들고, 지방당 조직을 전국 연합(National Union)이라는 이름으로 통합하네. 
조직 정비를 통해 당의 통일성을 높인 거지. 정책 면에서는 산업화에 따른 빈부 격차 
완화를 추구하고 강한 외교를 표방했네. 디즈레일리의 개혁을 통해 영국 보수당은 
귀족과 대지주의 정당에서 중산층과 일부 노동자까지 포괄하는 정당으로 확대된 거지.

나: 그 후론 위기가 없었나요?

버크: 없긴 왜 없어. 당장 1906년 선거에서 자유당에 정권을 내주고 무려 16년간 
야당 노릇을 했지. 1920년대에 가서야 스탠리 볼드윈이 반전 계기를 만들지. 
‘신보수주의’라는 구호를 들고나오면서 기존 보수당의 자유방임 경제 노선을 버리고 
케인스주의를 받아들인 거야. 그러면서 당의 지지 기반을 더욱 확대하지.

비슷한 위기가 1945년에도 왔어. 노동당에 정권을 내주고 나서 윈스턴 처칠과 그의 
동료들은 절치부심했네. 우선 당 조직을 정비했지. ‘젊은 보수(Young Conservatives)’
라는 새로운 조직을 만들어 적극적으로 젊은 층을 흡수했네. 당의 교육기관으로 
보수정치센터(Conservative Political Center)를 신설하고 당내 연구 기관도 
부활시켰지. 동시에 당원 증대 운동도 벌여나갔네. 당 조직 강화를 통해 기초 체력을 
다진 거야. 정책 면에서도 전후 복지국가의 흐름을 수용하고 노동당의 의제를 대거 
흡수했네. 복지국가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 많은 보수가 복지국가를 더 잘 
운영할 수 있다’고 대중에게 호소한 거야. 그 결과, 1945년 2차대전 종전 이후 
현재까지 79년 중 49년을 보수당이 집권한 것이네.

나: 아, 그랬군요. 우선 당 조직 정비를 통해 저변을 늘리고, 합리성만을 내세워 
정적(政敵)을 ‘악마화’할 것이 아니라 때로는 시대 흐름을 내다보고 상대방의 
어젠다도 흡수하는 유연성을 발휘하면서 실제 정책 성과를 통해 
실력을 보여줘야 한다. 이렇게 요약할 수 있겠군요.

에드먼드 버크는 아무 말 없이 빙그레 웃기만 했다. ‘고맙습니다’ 하며 연방 고개를 
숙이다가 눈을 번쩍 떴을 때, 서재에는 아침 햇살이 가득했다. 
한국의 보수 우파에게도 언젠가는 밝은 햇살이 비치는 날이 올까?

(출처: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