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안동시 정상동의 택지조성 과정 중에 무연고 분묘(墳墓)가 발견 되었다.
주인 없는 무덤이었기에 발굴 대상으로 선정되었으나 발굴을 위해 무덤의 외관
뚜껑을 연 순간 ‘철성이씨(고성 이씨의 옛 이름)'라 적힌 명정(銘旌: 다홍바탕에
흰글씨로 죽은 사람의 품계와 관직 성씨를 적은 천)이 나왔다.
무덤의 주인을 찾기 위한 작업이 시작 됐고 고성 이씨 ’이응태‘의 분묘로 밝혀 졌다.
곧이어 고성 이씨 문중에 알려졌고 문중 입회하에 발굴이 시작되었다.
이응태의 시신은 미라 상태였다.
머리카락 수염까지 썩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었을 정도로
보존이 잘 되어 있었다.
시신의 주변에서 총 18통의 편지가 발견되었는데 시간이 흘러 대부분의 편지는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그 중 <원이엄마 편지>는 예외였다.
무덤 속 시신의 가슴 위에 올려 진 한글로 쓰인 이 편지는 이응태의 시신처럼
잘 보존되어 있었다. 1586년 6월 1일 편지의 주인공인 이응태는 명종
11년에 태어난 안동 에서 손꼽히는 무반 가문의 자제였다.
발굴 당시 그의 키는 180센티에 무척 건장한 체격이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6년 전인 1586년 서른한살의 젊은 나이로
어린 아들과 임신 한 아내를 두고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남편을 떠나보내고 어린 자식과 임신한 몸으로 남은 아내의 심정은 어땠을까?.
남편의 장례를 앞두고 아내는 붓을 들어 남편을 향한 그리움과
사랑.슬픔을 한지 위에 한 자 한 자 적어 내려 갔을 것이다.
가로 58.5cm, 세로 34cm의 종이는 남편을 그리워하는 아내의
절실한 심정으로 빈 곳 없이 가득 찼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종이가 부족 하자 아내는 종이를 돌려
모서리 여백에 다시 글을 써 내려간다.
이 편지 속에는 사랑하는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는 아내의 슬픔과
사랑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원이엄마 편지>는 400여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썩지 않고 거의 완벽히 보존되었고
남편을 향한 아내의 사랑이 느껴진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오랜 세월 동안 무덤 속에 들어 있다가 우연한 기회에 빛을 보게 된 이 편지는
가볍고 얕은 사랑이 일상화한 지금 우리 시대에 잔잔하면서도
큰 울림으로 다가와 가슴을 친다.
서른한살의 나이에 안타깝게 떠난 남편의 뒤를 자신도 따르고 싶다는 내용의 원이엄마
편지는 세인들에게 '400여년의 사랑'이라는 눈물겨운 감동을 전하고 있다.
무덤에선 아들 원이가 입던 옷(저고리)과 원이 엄마의 치마도 나왔다.
형(이몽태)이 동생에게 쓴 한시 '울면서 아우를 보낸다.'와 형이 쓰던 부채에 적은
‘만시(輓時)’도 있었고 이응태가 부친과 주고받은 편지도 여러 통 발견됐다.
발굴된 의복은 40여벌에 이른다.
부친과 나눈 편지엔 전염병 관련 내용이 자주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무덤의
주인은 당시 전염병을 앓다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부친과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건 이응태가 처가살이를
하고 있었다는 걸 뜻한다.
당시(임진왜란 전)엔 결혼하면 시댁살이와 함께
처가에 가서 사는 것도 일반적이었다.
남녀가 동등한 대우를 받았다는 걸 뜻한다.
임란 전엔 재산 분할도 아들 딸 차별이 없었다. 이런 인식은 편지에도 드러나 있다.
'원이 아버지에게 올림.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고
하셨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나와 어린아이는 누구의 말을 듣고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당신 나에게 마음을 어떻게 가져왔고 또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 왔었나요?
함께 누우면 언제나 나는 당신에게 말하곤 했지요.
여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들도 정말 우리 같을까요?
어찌 그런 일들 생각하지도 않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시는 가요?
당신을 여의고는 아무리 해도 나는 살수 없어요.
빨리 당신께 가고 싶어요. 나를 데려가 주세요.
당신을 향한 마음을 이승에서 잊을 수가 없고
서러운 뜻 한이 없습니다.
내 마음 어디에 두고 자식 데리고 당신을 그리워하며
살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아~ 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서 자세히 말해주세요.
꿈속에서 당신 말을 자세히 듣고 싶어서 이렇게 써서 넣어 드립니다.
자세히 보시고 나에게 말해 주세요. 당신 내 뱃속의 자식 낳으면 보고
말할 것 있다하고 그렇게 가시니 뱃속의 자식 낳으면
누구를 아버지라 하라시는 거지요?
이런 슬픈 일이 하늘 아래 또 있겠습니까?
당신은 한갓 그곳에 가 계실뿐이지만 아무리 한들
내 마음같이 서럽겠습니까?
한도 없고 끝도 없어 다 못쓰고 대강만 적습니다.
이 편지 자세히 보시고 내 꿈에 와서 당신 모습 자세히
보여주시고 또 말해주세요.
나는 꿈에는 당신을 볼 수 있다고 믿고있습니다.
몰래 와서 보여주세요.
병술년(1586) 유월 초하룻날 아내가' (현대어 각색편)
자내 샹해 날다려 닐오대 둘히 머리 셰도록 사다가 함께 죽쟈
하시더니 엇디하야 나를 두고 자내 몬져 가시노.
날하고 자식하며 뉘 긔걸하야 엇디하야 살라하야 다 더디고 자내 몬져
가시난고. ”(당신 늘 나에게 이르되 둘이서 머리가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 하시더니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나와 자식은 누구한테 기대어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시나요...(후략)' (원본편)
이 원본을 보면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존재한다.
<원이엄마 편지>에는 ‘자내’ 라는 단어가 총 14번 등장한다.
원이엄마가 남편을 부르는 호칭으로 ‘자내’를 사용한 것이다.
16세기 조선시대 남편과 아내의 사이가 서로를 ‘자내’라고
부를 정도로 평등했던 것일까?
아니면 원이엄마가 틀을 깨고 쓴 것일까? 사실 ‘자내’라는 단어는
현재 아랫사람 에게 쓰는 호칭(자네)으로 바뀌었지만
임진왜란 전까지는 상대를 높이거나 적어도 동등하게
대우해 부르는 호칭이었다.
이 편지를 통해 과거의 ‘자내’와 현대의 ‘자네’는 다르게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전 까지는 상대를 높이거나 최소한 동등하게
대우해 부르는 호칭 이었다.
남편을 향한 원이엄마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것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시신의 머리맡에서 발견된 ‘미투리’이다.
미투리는 길이 23cm 볼 9cm이며, 뒤꿈치 부분은 한지로 감겨있었다.
미투리는 보통 삼으로 만들기에 황토색을 띠는데
이응태의 묘에서 발견된 미투리에는 검은색이 섞여 있다.
검은색 실 같은 것으로 만든 미투리. 과연 검은색 실의 정체는 무엇일까?
2002년 한 국내 방송사에서 검은색 실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한 연구소에 실험을 의뢰했다.
그 결과 검은색 실은 머리카락 수백여 년 전 사람의
머리카락인 것으로 밝혀 졌다.
이 머리카락은 원이엄마의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미투리를 싸고 있던 한지에 ‘내 머리 배혀’ ‘이 신 신어 보지’라는
글자 가 흐릿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만든 미투리 에서 남편의 병이 낫기를 바라는
아내의 간절한 마음이 느껴진다.
하지만 결국 남편은 그 신을 신어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 부부의 사랑은 현대의 부부들과는 다르다.
현대인 중 누가 사랑하는 이를 위해 머리카락 베어 미투리를 삼아 주겠는가?
이것은 조선시대의 문화를 염두에 두더라도 매우 특수한 경우였다.
'효경(孝經)'의 첫 장에 "신체와 터럭과 살갗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이것을 손상시키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다.
(身體髮膚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라고 하지 않았는가?.
어떤 경우든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은 금기시되었다.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의 효 사례들 가운데 손가락을 자르는 '단지(斷指)'와
허벅지 살을 베는 '할고(割股)'를 자주 볼 수 있다.
며느리가 병든 시어머니를 위해 다리 살을 베고 아들이 아버지 병을
치료 하기 위해 손가락을 자른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조선시대에 자신의 효나 열을 위해 신체를
훼손 하는 것이 빈번하게 장려되기도 했다
(모셔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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