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

시간과 내가 하나 되는 ‘一時’

김정웅 2016. 6. 12. 15:07



시간과 내가 하나 되는 ‘一時’

 
우리는

한평생 70년 가까운 시간을 산다.

그러나

시간에서 자유로운 순간은 없다.

 

태어나는 시간을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없고

죽는 시간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그리고

일생 동안 시간에 맞추면서 살아야 한다.

 

출근할 시간에 맞춰야 하고

학교 갈 시간에 맞춰야 하고

기차를 타고 전철을 타는 시간에 맞춰야 한다.

 

출고시간에 맞춰야 하고

배달시간에 맞춰야 한다.

한평생

시간에 맞추며 살아야 한다.

그러나

시간에 맞춰 산다고

시간을 자기화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가령

학교에 갈 시간에 맞춘다고

공부를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공부의

내용과 질은 천차만별인 것이다.

 

시간에 맞춘다는 것과

시간을 자기화한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시간을 자기화할 수 없다면,

그 시간은 죽은 시간이다.

 

그것이 문제다.

그런 의미에서 삶이란 것은

‘시간의 자기화’에서 결판이 난다.


우리는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눈다.

과거는 이미 흘러가서 없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아서 없다.

현재라는 시간도

엄밀하게 따지면

과거와 미래의 접점과 같은 것일 뿐이다.

 

현재라는 것은

한 달도 아니고 하루도 아니고 한 시간도 아니다.

일순간, 일찰나 일 뿐이다.

일찰나 에 과거 속으로 사라져 간다.

 

우리는 과거를 살 수 없고

미래를 살 수 없고

찰나를 살고 있을 뿐이다.


70년을 산다고 하지만

실은 찰나를 살고 있을 뿐이다.

그러면

화살같이 날아가는 시간을

어떻게 자기화할 것이냐?

그것이 문제다.

 

시간을 자기화한다는 것은

그 시간 그 자리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정확히 다하는 것,

그 일 속에 자신을 완전 연소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반드시 후회와 미련을 남긴다.

 

‘그때 공부를 열심히 해야 했었는데’라든가

‘그때 조금만 더 열심히 했더라면’이란

미련과 후회를 남긴다.

그것이

소위 ‘업’(業)이다.

 

잃어버린 시간의 퇴적, 그것이 ‘업’이다.

시간을

자기화할 수 없다면 시간은 놓친 것이다.

 

시간의 의미는 없다.

오히려 짐이 된다.

 

그래서

시간을 자기화할 때

삶의 궤적이 확보될 수 있는 것이고

시간을

자기화하지 못하면 무거운 짐이 된다.

우리가

‘정신 차린다’고 하는 것,

그것이

시간의 톱니바퀴와 맞물리는 순간이다.

 

시간은 시간대로 흘러가고

나는 나대로 흘러간다면

시간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절대시간의 의미는 없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시간이란 것은

무의미하다.

정신을 차리는 한순간,

그것만이

삶의 궤적을 확보한다.

정신을 차린다는 것은,

몸과 마음과 생각이

하나로 합치하고 있을 때이다.

그때

시간을 자기화한다는 개념이 성립한다.

그 시간을

‘일시’(一時)라고 말한다.

 

그렇지 않은

시간은 ‘일시’가 되지 않는다.

시간과 내가 하나로 합치할 수 없는 시간,

둘로

분열된 시간은 ‘일시’가 아니다.



불교의 경전 ‘금강경’ 같은 데서

‘一時’라는 용어가 나온다,

그 일시(一時)의 의미도 그렇다.

 

그냥

과거의 한때라는 의미가 아니다.

시간의 이치와 합일이 돼 있을 때,

시간의 이치를 자기화하고 있을 때,

 

그래서

객관세계와 하나로

소통할 수 있을 때라는 의미다.

정신을 차린다고 할까,

깨어 있는 순간이라는 의미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말이 있다.

다른

이야기가 아니다.

 

화살처럼

날아가는 시간을 놓치지 말라는 것이고

거기에서

살 길이 열린다는 그런 의미다.


영남대 배용순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