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에 들었던 말 중에
조선의 7대 상놈이 ‘천방지축마골피 (天方地丑馬骨皮)’ 라는 설이 있었다. 이 중에
‘천(天)’은 무당이요, ‘방(方)’은 목수, ‘지(地)’는 지관, ‘축(丑)’은 소를 잡는 백정,
‘마(馬)’는 말을 다루는 백정, ‘골(骨)’은 뼈를 다루는 백정, ‘피(皮)’는
짐승의 가죽을 다루는 백정이라 하였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말은 근거 없는 호사가들의 낭설에 불과하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천민에게는 애초부터 ‘성(姓)’이 없었다. 특히 천민 중에 노비는
삼월에 태어나면 ‘삼월이’ 오월에 태어나면 ‘오월이’ 하는 식으로 주인이 제 맘대로
작명하였다. 천민에게는 성씨 자체가 없었으니 당연히 족보랄 것도 없었다.
전 국민이 성을 갖게 된 것은, 신분제를 폐지한 ‘갑오경장’(1894년) 이후부터이며
갑오경장 이전에 성을 가진 인구는 전체의 30%에 불과했다.
1909년 일제에 의해 민적법(民籍法) 이 시행됨에 따라 호적이 정리되면서 부터는
천민들도 주인의 성을 쓰거나 원하는 성으로 호적을 등록하여
누구나 성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 천민이 성을 갖게 될 때는 대체로 김(金), 이(李), 박(朴) 등
기존의 대성(大姓) 이나 사회적으로 흔한 성씨를 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천민임을 숨겨야 하기에 흔한 성을 쓸 수밖에 없었고 인구수가
적은 성을 쓸 까닭이 없었다. 그래서 유명 성씨는 더욱더 커지게 되는 사회적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현존하는 250여 성 가운데 김·이·박·최·정 씨 등의 5대 성이
전체 인구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백성(百姓)’이라는 말의 원래 의미는 ‘온갖 성씨’라는 뜻으로 고대에는 귀족을
가리키다가 후대에 와서 일반 서민을 뜻하게 된 이유도 여기에 유래한다.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에 의하면 중국식 성씨의
보급 시기를 고려초로 보고 있다.
그는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자 비로소 중국식 성씨 제도를 전국에
반포함으로써 사람들이 점차 성을 가지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또한, 고려 문종 때는 성씨가 없는 사람은 과거시험을 볼 수 없게 한다는
법령인 ‘봉미제도(封彌制度)’ 가 생긴 뒤로부터 귀족들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성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세종실록지리지 (世宗實錄地理志) 에는 250여 개의 성이 등장하고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270여 개의 성이 나오며,
이의현의 『도곡총설(陶谷叢說)』에는 298개의 성이 나타난다.
이는 귀화성과 멸절된 망성(亡姓) 등이 모두 합산된 것이다.
이를 통해 본다면 15세기이래 현재까지 한국인 성씨의 수는
대략 250개 내외였다고 볼 수 있다.
송나라 소사(邵思)의 『성해(姓解)』에 의하면 한자 성의 종주국인 중국에는
2,568개의 성이 있다 한다.
또한, 일본의 씨(氏)는 그 종류가 10만에 가까운 것을 볼 때 우리의 성씨는
지극히 적은 편에 속한다.
현재 우리나라 성씨는 통계청의 ‘2000년 인구센서스’에 의하면,
286개 성씨와 4,179개의 본관이 있다고 전해진다.
그렇다면 ‘천방지축마골피(天方地丑馬骨皮)’의 속설은 어떻게 된 것일까?
영양 ‘천(千) 씨’와 온양 ‘방(方) 씨’, 충주 ‘지(池) 씨’ 등은
두 귀화 성씨로서 명문 세족이다.
이순신 장군의 장인으로 알려진 온양 ‘방(方) 씨’ 방진(方震)은 보성군수 출신의
무관이었으며, 충주 ‘지(池) 씨’는 조선 태조 이성계와 사돈을 맺을 정도로
고려 말에 높은 관직에 있었다.
아울러 ‘축 씨’와 ‘골 씨’ 는 현재 남한에는 존재하지 않는 성씨이다.
그리고 ‘지관’이나 ‘목수’ 역시 천민 출신이 아니라 중인 계급이다.
특히 지관은 국가에서 선발하는 과거 제도 ‘잡과’ 중 ‘음양과’에 합격하여야만
지관이 될 수 있었다.
음양과는 천문학, 지리학, 명과학으로 나뉘는데, 지금의 기상청 공무원이나
건축과 지적직 공무원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조선 7대 상놈’의 속설은 역사서나 고문헌의 어떤 기록에도 근거가 없어 그 유래를
알 수가 없으며, 조선왕조실록 에도 해당 성씨를 가진 ‘백정’은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고문서를 공부한 학자로서 사견임을 전제로 추정컨대 ‘천방지축(天方地軸)’의
‘천방(天方)’은 하늘의 방위를 가리키는 말이고 ‘지축(地軸)’은 지구가 자전하는
중심선을 가리키는 말이므로 천방지축이란 ‘하늘로 갔다 땅속으로 갔다 하면서
갈팡질팡하다’ 라는 뜻으로 ‘당황해서 몹시 급하게 허둥지둥
날뛰는 모양’ 을 가리키는 말이다.
여기에 ‘마골피(馬骨皮)’란 ‘말 뼈다귀’라는 속어로서 요즈음 우리가 쓰는 욕설 가운데,
“어디서 굴러먹던 ‘개뼈다귀’야” 할 때의 ‘개뼈다귀’와 같은 의미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하늘과 땅의 방향도 모르는 어디서 굴러먹던 말 뼈다귀 같은
놈’이라는 비속어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근본도 족보도 없는 상놈을 비칭 할 때 쓰이던 한자 말로 된 욕설이라고 나는 추정한다.
식민지 시절, 일제에 의해 ‘민적법(民籍法)’과 일본식 씨명제(氏名制)인
‘창씨개명 (創氏改名)’이 시행되었다.
이때 일본인에게는 ‘개명보다 무서운 게 창씨’였다. 조선인이 일본인과 동등한 지위,
동등한 시민권을 가질 수 있다는 데 거부감을 표시한 것이다. 이는 일본인이나
한국인 모두에게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한국인은 ‘민적법(民籍法)’으로 인해 평민과 천민 모두가 양반의
성씨를 가질 수 있는 계층이동의 기회가 된 것이다.
창씨개명은 한국의 성명(姓名)을 일본식 씨명(氏名)으로 바꾸는 것이므로 창씨(創氏),
즉 ‘씨(氏)’를 창제하는 일과 함께 이름 역시 ‘개명(改名)’하도록 하였다.
다만 창씨만 의무였고 개명은 자유였기 때문에 창씨만 하고
개명은 안 한 사람들이 많았다.
유학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동참했던 송몽규 (宋夢奎) 는 ‘송촌몽규
(宋村夢奎)’ 로 창씨만 하고 개명은 하지 않았다.
친일파 윤치호 (尹致昊) 역시 ‘이동치호(李東致昊)’라고 창씨만을 하였으나
세인들은 그를 ‘이똥 치워’라고 불렀다는 후일담이 전해진다.
우스운 일화로 ‘신불출(申不出)’ 이라는 만담가가 있었다.
그의 본명은 알 수 없지만, 그의 예명이 ‘불출’이 된 사연은 ‘이렇게 일본 세상인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세상에 나지 말았어야 했다’라는 의미란다.
그가 창씨개명한 이름은 ‘현전우일(玄田牛一, 구로다 규이치)’ 이다. 이를 한 자로
풀이하면 玄(검을 현)과 田(밭 전)을 더하여 ‘畜(가축 축)’이 되고, 牛(소 우)와
一(한 일)을 더하여 ‘生(날 생)’ 자가 된다. 그러므로 자신의 이름을 ‘축생(畜生)’으로
비하한 것이다. 곧 일본의 욕설인 ‘칙쇼(畜生)’를 파자한 것이다.
이제는 근본도 뿌리도 없이 족보를 모르는 백성이 다수가 되어 조상을 찾는
일조차 무의미한 일로 치부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나의 생명의 근원을 밝히고 뿌리를 찾아내는 것이야말로 영혼이 있는
생명으로서 무엇보다 소중한 일임에 틀림이 없다.
(모셔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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