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용훈 카이스트 교수 -

우리나라가 지금 반도체와 원자력으로 세계를 주름잡고 있지만 머리가 좋아서 만들어 낸
대박이 아니라, 사실 40년 전 세계라는 거대한 무대에서 벌어진 그야말로
목숨을 건 게임의 결과물입니다.
1980년대 일본에게 "너희가 안보를 무임승차 했으니 돈을 내놔야지!" 전두환 대통령 집권 당시,
한일 관계가 아주 묘했어요.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정광태 노래도 그 시절에 나온 것이죠.
우린 전두환 대통령이, 미국에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일본에는 나카소네 총리가 있었는데,
세 사람 모두 자기 색깔이 확실한 대단한 독종들이었습니다.
당시 한국은 돈이 너무 없어서 전두환 대통령이 일본 나카소네 총리에게 뜬금없이 100억 달러만
빌려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일본은 기가 막혔죠. 돈 준지 얼마 안됐는데
또 갑자기 무슨 돈을 그렇게나 많이 달라는 겁니까?
우린 아주 기발한 논리를 들이댔습니다.
[우리가 맨 앞에서 피 흘리며 북한이랑 소련을 막아주고 있으니까, 너희가 뒤에서 편하게
장사하는 것이 아니냐? 안보를 무임승차 하지 말고 그 비용을 내 놓아라!]
일본은 펄쩍 뛰었고 한일 관계는 얼어붙었는데, 이때 구원투수로 등판한 게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이었습니다. 레이건은 소련을 압박하려면 한미일이 똘똘 뭉쳐야 하는데 둘이
싸우고 있으니 답답했죠. 그래서 은밀히 일본 나카소네 총리의 등을 떠밉니다.
"나카소네 총리! 당신이 돈 좀 써서 한국을 달래시오!"
눈치 빠른 나카소네 총리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1983년에 전격적으로 한국에 와서
전두환 대통령과 술잔을 기울이며 노란 셔츠 입은 사나이까지 열창하는 파격적인
감성 외교를 펼쳤고, 결국 원래 요구보다는 좀 깎였지만 무려 40억 달러라는
거금을 한국에 지원하기로 합의합니다.
이것이 바로 한미일 3각 안보체제의 탄생이자 우리 대기업들이 성장할 수 있는,
거대한 멍석이 깔리는 순간이었습니다.
◇ 반도체, 미일 전쟁의 틈새를 파고들다.
- 이 멍석 위에서 일어난 두개의 기적
첫 번째가 반도체인데, 당시 전 세계 반도체는 일본의 도시바, 히타치 등이 싹쓸이하고
있었습니다. 미국 실리콘밸리가 망하기 일보 직전이었죠. 분노한 미국 레이건
대통령이 일본을 미친듯이 때리기 시작합니다. 보복 관세를 매기고,
엔화 가치를 폭등시켜서 일본의 수출길을 막았습니다.
이때, 미국은 일본 반도체를 대체할 말 잘 듣는 파트너가 필요했는데, 마침 한미일 동맹으로
엮인 한국이 눈에 들어왔죠. 미국은 한국이 반도체를 하겠다고 하니 은밀히 묵인하고
도와줍니다. 일본이 기술을 안 주겠다고 버티니까 미국 마이크론이 한국에
기술을 넘겨주도록 주선해 주기까지 했습니다.
이 틈을 타서 삼성 이병철 회장이 내 전 재산을 걸겠다면서 베팅을 했고, 현대 정주영 회장도
뛰어들었습니다. 나라에서 준 돈도 있었지만, 그분들은 이거 못 하면 회사 망하고 나라도
망한다면서 연구원들과 숙식을 함께하며 피를 쏟은 결과가 지금의 삼성과 하이닉스 입니다.
즉, 미국이 일본을 때릴 때 어부지리로 기회를 잡고,
피땀으로 완성한 행운이었던 것입니다.
◇ 원자력 설계도를 훔쳐 온 기술자들
두 번째 기적은, 원자력입니다.
반도체랑 소름이 끼칠 정도로 똑같은데, G7프로젝트 중 성공한 두 프로젝트도
반도체와 원자력입니다.
원래 우리는 원전을 지을 기술이 아예 없어서 미국에서 돈을 빌려와 고리 1호기, 국가 예산의
1/4로 경부고속도로 건설 등을 해야 하는 처지였는데, 우리 정부가 몰래 핵무기를
개발하려다 미국에게 딱 걸리는 사건이 터지면서 난리가 났습니다.
결국 우리는 핵무기를 포기하는 대신, 평화적인 원전 기술은 무조건 다 넘겨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냅니다.
마침 그때 미국은 2호기 TMI 원전 사고가 났고, 1호기는 영구 정지 후 원전을 더 건설하지
못해 기업들이 죽어가고 있었는데, 마이크로소프트가 재가동시켜서 20년간 전기를
구매하기로 계약하면서 일거리가 급했던 미국 기업들과, 기술이 고팠던
한국의 이해관계가 딱 맞아 떨어진 것입니다.
이때 우리 원자력 연구원들이 미국으로 건너가서 정말 눈물겨운 사투를 벌입니다.
미국 기술자들이 자존심 상하게 도면도 잘 안 보여주니, 낮에는 어깨너머로 훔쳐보고
밤에는 숙소에 모여 코피를 쏟아가며 설계도를 통째로 베꼈습니다.
그리고 베낀 설계도를 가지고 와서 지금의 두산에너빌리티, 당시 현대양행 같은 대기업들이
리스크를 감수하면서 원자로를 만들어 냅니다. 그렇게 기술을 훔쳐오다시피 해서
만든 게 지금 우리 고유의 원전 모델입니다.
웨스팅하우스가 원천기술로 로얄티를 뜯어가긴 했지만, 우리의 독자 설계와 제작 운영은
실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세월이 흘러 지금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전쟁터에 서 있습니다.
40년 전에는 미일이 싸웠다면 지금은 미중이 패권 전쟁을 벌이고 있고, 중동에서는 이란
전쟁까지 터져 전 세계 공급망과 에너지 시장이 요동치고 있는데, 상황이 이런데도 사람들은
이병철, 정주영 같은 거두들의 결단을 그저 당연한 옛날 이야기로 치부하며 과소
평가하곤 하는데, 우리는 그분들 앞에 정말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합니다.
무모해 보이는 리스크 앞에서도 나라의 생존을 외치며 전 재산을 걸었던 그 거인들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정치를 하고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지금 이 거대한 미중 전쟁과 글로벌 위기
속에서 우리는 어디에 우리의 전 재산과 국가의 사활을 걸어야 할까요?
첫째는, AI와 차세대 반도체의 주도권입니다.
미국이 중국의 첨단 기술을 원천 봉쇄하고 있는 지금, 우리는 단순히 메모리를 잘 만드는 수준을
넘어 AI 연산의 핵심인 NPU, 온디바이스 AI 같은 원천 기술에 국가의 명운을 걸고 돈과 시간과
노력을 쏟아 부어야 합니다. 여기서 밀리면 다음 세대에는 하청기지로 전락합니다.
둘째는, 이란 전쟁으로 요동치는 에너지 안보를 책임질 대형원전 SMR과
독자적 원자력 연료입니다.
중동발 에너지 위기가 올 때마다 휘청이지 않으려면, 세계 최고인 우리 원전 기술을 바탕으로
차세대 원전 시장을 선점하고 차세대 대형원전 SMR 고속로 연구나, 우라늄 농축, 재처리
같은 독자적인 원자로, 원자력 연료 능력을 확보하는 데 사활을 걸어야 합니다.
에너지가 곧 안보이자 생존 무기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삼전, 하이닉스가 잘 나가고 우리 원전이 세계 최고인 것은 40년 전 선배들이 국제
정세의 판을 기가 막히게 읽었고, 운도 좋았고, 목숨 걸고 씨앗을 심었기 때문인데,
기가 막히는 것은, 지금 우리나라 돌아가는 모습입니다. 마치 지금의 우리가 잘해서
대기업들이 잘 나가는 줄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30년, 40년 뒤 미래를 위해서 새로운 씨앗을 심고 투자를 하거나 규제를 풀어줄 생각은
안 하고, 그저 과거 선배들이 남겨준 빌딩에서 나오는 월세, 즉 대기업의 세금과
성과를 서로 더 많이 뜯어먹겠다고 싸우고만 있습니다.
거대한 라인의 한 장비 앞에서 당번 서는게 그렇게 큰 기여인가요?
또, 한 때 문재인 정부에서는 정치적인 이유로 세계 최고 수준의 원전 생태계를
스스로 무너뜨리기도 했고요.
농부가 봄에 씨를 안 뿌리면 가을에 굶어 죽는 건 당연한 이치인데, 지금 우리는 남이 차려
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얹어놓고 밥을 더 많이 달라고 투정을 부리는 꼴입니다.
과거의 역사를 모르면 지금 누리는 번영이 영원할 것이라고 착각하기 쉬운데,
정말 정신 차리지 않으면 다음 세대에는 먹고살 게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정말로 걱정스럽기만 합니다.
- 정용훈 카이스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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