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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문'과 '여백(餘白)'

김정웅 2026. 2. 16. 00:06

 

"도둑은 잡지 말고 쫓으라."는 말이 있습니다. 경행록(景行錄)에도 "남과 원수(怨讐)를 
맺게 되면 어느 땐가는 화(禍)를 입게 될지 모른다."라고 했다.

제갈공명(諸葛孔明)도 죽으면서 "적을 너무 악랄(惡辣)하게 죽여 내가 천벌(天罰)을 
받는구나..."라고 후회 (後悔) 하며 "적(敵)도 퇴로(退路)를 열어주며 
몰아붙여야 한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 시골집에는 대문 (大門)이 있고 뒤쪽이나 옆모퉁이에 
'샛문'이 있는 집이 많았습니다.

우리 집에도 뒤뜰 장독대 옆에 작은 샛문이 하나 있어서 이곳을 통해 대밭 사이로 
난 지름길로 작은 집에 갈 수 있어서 자주 드나들었습니다.

이 샛문은 누나들이나 어머니가 마실 을 가거나 곗방에 갈 때 그러니까 어른들 몰래 
드나들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어른들의 배려(配慮)였는지도 모릅니다.

옛날 어른들은 알면서도 눈감아 주고 속아준 일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마음의 여유(餘裕)"이고 "아량(雅量)"일 것 입니다.

제가 열세 살 때의 일입니다. 황금(黃金)물결 넘실거리던 가을 들녘은 추수(秋收)가 끝나자 
삭막 하였지만 넓은 마당은 다니기도 어려울 만큼 나락베눌(낟가리)로 꽉 차 있었습니다.

하늘 높이 쌓아놓은 나락베눌은 어린 우리들이 보기에도 흐뭇했는데 여름내내 땀흘리며 
고생(苦生)하셨던 어른께서는 더욱 그러하셨을 것 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신나게 숨바꼭질을 하며 놀았습니다.

늦가을 어느 날 타작(打作)을 하며 나락을 마당에 쌓아놓고 가마니로 덮어놓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 어수선한 소리에 나가보니 거위 한 마리가 목이 잘린 채 
대문 앞에 죽어 있었습니다.

원래 암놈 거위는 목소리가 크고 맑아 소리를 쳐서 엄포를 놓거나 주인에게 구호(救護)
요청(要請)을 하고 숫놈 거위는 허스키한 목소리 를 내며 괙괙 소리를 지릅니다.

목을 길게 빼고는 날개를 치면서 덤벼 들어 물어뜯는 고약한 성질(性質)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동네 아이 들이 무서워서 우리 집에는 얼씬도 못했습니다. 웬만한 개보다도 
사나워 집 지키기에는 안성맞춤이었습니다.

그 무렵은 식량(食糧)이 귀하던 때라 도둑이 많아 개나 때까우(거위)를 키우는 
집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웬 일인지 그날 밤에 도둑이 든 것입니다.

때까우가 도둑놈의 바짓가랑이를 물자 낫으로 목을 후려쳐 죽이고 나락을 퍼담아 가지고 
간 것입니다. 그날 밤은 초겨울 날씨로 바람이 몹시 불고 추웠습니다.

마침 싸락 눈이 내려 발자국이 눈 위에 선연하게 나타나 있었습니다. 나는 아버지 뒤를 
따라 강아지 마냥 종종 걸음으로 쫓아갔습니다.

발자국은 고샅(마을의 좁은 길)을 지나 맨꼭대기 오두막집으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뒤돌아서 발자국을 지우며 내려오시는 것이었습니다. 

평소 아버지는 호랑이같이 무섭고 급(急)한 성격(性格)이라 당장 문(門) 을 차고 들어가 
도둑의 덜미를 잡고 끌어내서 눈밭에 팽개치거나 동네 사람들을 모아놓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멍석말이라도 했어야 했습니다.

아니면 경찰서(警察署)로 끌고가서 곤욕(困辱)을 치르게 하거나 형무소 (刑務所)를 
보냈음직한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뒷짐을 지고 돌아 오셨습니다.

"어린 새끼들을 데리고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이런 짓을 했을라고..." 

어린 소견(所見)이었지만 여름내내 불볕 더위 속에서 땀흘리며 농사 (農事)지어 
탈곡(脫穀)해 놓은 나락을 훔쳐간 도둑을 당장 요절이라도 냈어야 
평소(平素)아버지다운 위엄 (威嚴)이 설 것 같았습니다.

저는 오랜 세월(歲月)이 흐른 후에야 아버지의 깊은 뜻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마음의 여유(餘裕)"이고, "지혜(智慧)"라는 것을! 
"도둑은 잡지말고 쫓으라."는 말씀도 함께...

그 날 이후 H씨는 평생(平生)토록 원망(怨望)과 원한(怨恨) 대신에 나락 한가마니 빚을 지고 
아버지에게  그 은혜(恩惠)를 갚기 위해 우리 집에서 살다시피하며 
궂은 일도 마다치 않고 도맡아 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가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세상(世上) 일은 꼭 생각같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이치나 원칙(原則)만으로 해결(解決)할 수 없는 문제(問題)들이 많이 있다. 

남의 사소(些少)한 실수(失手) 같은 것을 덮어주지 못하고 
몰아세우고 따지는 우를 범하지 말아라.

사람을 비난(非難)할 때도 상대방 (相對方)이 변명(辨明)할 수 없도록 무차별(無差別)
공격(攻擊)하는 것은 삼가야 한다. 상대방이 달아날 구멍을 
항상(恒常) 조금은 남겨 놓아라..."

현대(現代)를 사는 우리도 "샛문"과 "여백(餘白)"의 아름다움이 필요 (必要)하지 않을까요? 

동양화(東洋畵)에서 여백은 무한 (無限)한 의미(意味)를 내포(內包) 하고 있습니다. 
이 여백은 보는 이의 몫으로 구름, 새, 꽃, 나아가 보이지 않는 바람까지도 
그려 넣을 수 있는 "여유(餘裕)의 공간(空間)"입니다.

우리는 수묵화의 넉넉함과 아름다움을 즐기면서도 자신의 마음을 
비우는데는 인색(吝嗇)합니다.

항상 위만 쳐다보고 달려가다 보니 고달프기도 하고 외롭습니다. "적정(適正)한 소유(所有)가 
마음의 평안(平安)을 주고 여유를 가진 삶이 풍요(豊饒)를 누린다."는 진리(眞理)를 
우리는 대부분 지식(知識)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너무 완벽(完璧)하고 철두철미 (徹頭徹尾)한 사람은 타인(他人)이 접근(接近)하기가 
부담(負擔)스럽고 경계(境界)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공자는 '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가 살 수 없는 것처럼 사람도 남의 옳고 그른 것을 
계속(繼續) 살피다보면 친구 (親舊)가 남아 있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약간(若干) 엉성하고 빈틈이 있어야 함께 어우러지기도하고 서로 동화 (同化)되기도 
한다는 사실(事實)이 새삼스럽게 다가오는 요즘입니다.

"돈을 귀히 여기는 자는 재물(財物)을 가지나 사람을 귀히 여기는 자는 
천하 (天下)를 얻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셔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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