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

아내와 나 사이 /이생진 시인

김정웅 2021. 11. 18. 00:02

 

아내는 76이고
나는 80입니다
지금은 
아침저녁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지만 
속으로 다투기도 
많이 다툰 
사이입니다.

요즘은 망각을 
경쟁하듯 합니다

나는 창문을 
열러 갔다가
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고

아내는 
냉장고 문을 
열고서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누구 기억이 
일찍 들어오나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은 서서히 
우리 둘을 떠나고
마지막에는 

내가 그의 
남편인 줄 모르고
그가 
내 아내인 줄 
모르는 날도 
올 것입니다.

서로 모르는 사이가
서로 알아가며 살다가
다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는 세월
그것을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인생?
철학?
종교?

우린 너무 먼 데서 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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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상문 - 김남호

‘오래된 미래’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가올 시간이지만 이미 충분히 예견된 탓에 
낯설지 않은 미래를 이렇게 부릅니다.

 노후(老後)야말로 
‘오래된 미래’ 중 하나지요. 
‘생로병사(生老病死)’라는 피해갈 수 없는 외길에서 
지금의 이 단계를 지나면 다음 코스에서는 
뭐가 나올지 우린 다 알지요. 

다 알기 때문에 오래되었고, 
그럼에도 아직은 오지 않았기에 미래(未來)인 거지요.
 
 지난 2019년 봄 평사리 최참판 댁 행랑채 마당에서 
박경리 문학관 주최로 ‘제1회 섬진강에 벚꽃 피면 
전국시낭송대회’가 열렸습니다. 

60여 명이 참가한 이 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했던 낭송시가 
바로 이생진 시인의 이 작품입니다. 

7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남성 낭송가의 떨리고 갈라지는 
목소리에 실려 낭송된 이 시는 청중들로 하여금 
눈시울을 젖게 하였습니다. 

좋은 낭송은 
시 속의 ‘나’와 낭송하는 ‘나’와 그것을 듣는 ‘나’를 
온전한 하나로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내 몸의 주인인 기억이 하나둘 나를 빠져나가서 
마침내 내가 누군지도 모르게 되는 나이.

 나는 창문을 열려고 갔다가 그새 거기 간 목적을 
잊어버리고 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고,

아내는 무엇을 꺼내려고 냉장고에 갔다가 냉장고 문을 
열어놓은 채 그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장면은 상상만 
해도 앞이 막막하고 울컥하지 않습니까.
 
 시인은 차분하게 이 참담한 상황을 정리합니다. 

우리의 삶이란 
“서로 모르는 사이가/서로 알아가며 살다가/
다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는 세월”일 뿐이라고. 

그리고 자책하는 목소리에 담아 우리를 나무라지요. 
거창하게 인생이니, 철학이니, 종교니 하며 

마치 삶의 본질이 거기에 있기나 한 것처럼 핏대를 
올리는 당신들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하고...

진리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우린 너무 먼 데서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아내와 나 사이’의 거리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바로미터인 셈이지요.

( 김 남 호 / 문학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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