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교 가는 길, 중간 중간에 흙길이 조금이라도 좋은 구역은, 신발이 닳을세라
벗어들고 맨발로 뛰어 가든, 검정 고무신 세대에 태어난 우리들...
책은 보자기에 싸서 어깨에 가로 묶음으로 하여 달리면, 필통에서 벤또(도시락)에서
달그락달그락 소리가 났던 '몽땅 연필의 세대'....
영양 부실로 얼굴에 마른 버짐이 하얀 꽃을 달고, 머리에 지껄과 동그라미 도장밥,
다리에도 여기저기 긁은 자국을 갖고 살아온 '흉터 자국의 세대'....
보리고개 시절에는 거반 점심을 굶어, 하교길에는 빼기, 잔대, 개구리 뒷다리, 천방뚝 뽀삐,
찔레 순, 고딩이, 메뚜기. 새박우, 뱀딸기, 송구, 고염, 개멀구, 개복숭아, 머루, 다래, 참꽃...
하늘 아래 입안에 넣을 수 있는 것은 샅샅이 뒤져서, 다 먹고 다닌 허기진
어린 시절이 우리에게 있었죠.
학질. 귀앓이, 배앓이, 지랄병, 천연두, 문둥병, 천식, 그리고 횟배, 배고픔으로 이런저런
병을 겪었지만, 바르는 약은 오직 된장이나 개멀구 잎사귀, 먹는 약은 금계랍, 회충약은
산토닉, 그리고 바르는 약은 아까징끼와 옥도정끼로, 몹쓸 고질병을 겪은 우리들이었죠.
춘궁기에 허기져서 미처 익지 않은 보리를, 낫으로 조금씩 먼저 베어서
먹었던 '보릿고개의 마지막 세대'...
반찬이 없어. 찬물에 식은 보리밥 말아 먹은 마지막 백비탕에, 가마솥 누룽지도
서로 먹으려고 했던 '게걸대든 세대'...
1년 내내 학교 다니면서도 눈깔사탕 한 개도 못 빨아먹고, 소풍 날 사탕 하나
얻으면 돌아가면서 빨아 먹었던 '사탕 공동으로 빨았던 세대'...
미군이 준 껌 하나를 춘자가 며칠 씹고, 그다음 말자도 며칠 씹고, 잠 잘 때 벽에 붙여
놓았다가, 다음 날은 남동생들이 돌아가면서 씹었던 '껌 돌림빵 세대'였지요.
국수 한 그릇 준다면 잔치 일도 돕고, 모심기 일을 도와주던 그 시대에, 때로는
친척집에 가서도 밥그릇에 담긴 양이 모자라지만, 밥 한 그릇 다
비우지 못하고 꼭 체면치레로 몇 숟갈 남겨야만 했죠.
읍내 장날 가서도 국밥 한 그릇 사 먹지 못하고, 쫄쫄 굶고 집으로 별 헤면서
힘없이 돌아오던 그날들...
미군 부대 밀가루 포대로 검정 물 들여서 바지 저고리만 입었던
'노팬티의 마지막 세대'...
참외나 수박 살돈이 없어 보릿쌀이나 감자를 들고가서 바꾸어 먹었던,
마지막 낱알 '물물교환의 세대'......
석유 살 돈 없어서 소나무 관솔 불로 숙제했던, 콧구멍이 시커먼 '관솔불 세대'...
성냥을 다항이라고 부르고, 그거 한 통 살 돈 없어서 성냥을 낱알로 사서 쓰거나.
그도 없으면 군불 아궁이에 밑불 무덤 만들어 사용했던 '마지막 불씨의 세대'...
아침 세수는 앞 개울까지 뛰어나가서 비누 없이 얼굴 씻고, 이빨은 개울의
고운 모래를 가운데 손에 묻혀서 닦던 '마지막 모래 치약 세대'...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와 섬마을 선생님 라디오 연속극 들으려고, 동네 부잣집 사랑방과
마당에 먼저 좋은 자리 잡으려 가던, '축음기 라디오 공동 청취 세대'...
추운 겨울날, 단백질 보충을 위해서 손 전등을 들고, 논두덕 밭두덕과
초가지붕 추녀에 잠든 참새잡이 하던 '참새 단백질 세대'...
그 밖에도,
추운 겨울 논 웅덩이가 꽁꽁 얼면, 진흙 속에 잠자는 미꾸라지 잡으러 다녔던 세대...
등 하교길은 십리 이 십리 산길을 뛰어다녀야 할 만큼 멀고, 해가 일찍 저물면
부모님들이 호롱불 들고 산 고갯길까지 마중 나와서 집으로 돌아간 세대...
등 하교길에 만나는 문둥병 걸인은 아이들 간을 빼먹는다.
애기 무덤은 여우가 파먹는다.
상여 집에는 피 묻은 귀신이 나온다.
돌고개 마루에 늑대가 있다.
등교길 여기저기 귀신 이야기가 숨어 있어도, 비록 어리지만
간 큰 아이들이 많았던 세대...
정월 대보름은 하루 전에 산에 올라서 달맞이 불 피울 소나무 쌓아놓고, 보름달 솟는
날은 불 피우면서, "달 봐라!" 고래고래 고함치며 소원을 빌고, 어느 동네 불이
가장 크고 잘 타는지, 무언의 시합을 했던 마을 공동 달맞이 불꽃놀이 한 세대...
흑세미 붉은 당가루로 개떡 만들어도 별미로 치던 개떡 세대...
선 보러 갈 때는 동네 아는 삼촌의 양복 빌려 입고 갔던, 마지막 양복 빌림 세대......
마을 형님 장가 드는 날, 새색씨 보고 싶어 꼬맹이들이 새색시 가마 넘어오는
돌 고개까지 마중 나갔던 꽃가마 구경 세대...
첫날 밤, 새 신랑이 각시 옷 벗기는 것 구경한다고 올망쫄망 문고리 잡고 들여다보다가,
신랑이 뿌리는 간장 물 덮어쓰고 불 꺼진 새 색시방에 청양초 불 태워서,
매운 연기로 신랑 각시 괴롭히든 장난기 많은 세대...
브레지어 없이 젓 가리개로 시집온 새댁, 신혼살림은 변변한 옷장 하나 없이 미군이
쓰고 버린 보루박스, 비닐용 비키니 옷장과 사글셋방에서 시작한
마지막 사글세 단칸 신혼방 세대...
새신랑 매달아 놓고 발바닥을 패던 초야놀이를 한 세대...
아버지가 장에 가시거나 이웃 마실 나가시고 해 떨어져도 안 돌아오시면,
호롱불 들고 밤길 마중 갔던 마지막 호롱불 마중 세대...
부모님에게 말엔 대꾸 할 줄 모르고 어려서도 논밭에 나가 새끼 머슴처럼 일하면서,
늘 부모님 말씀을 듣고 끝까지 모시는 마지막 세대...
추석 성묘는 일가친척 다 함께 이 산골 저 산골 선대 산소 벌초다니는 마지막 세대....
부모상은 3일 밤낮을 곡하고, 빈소와 제사를 정성껏 모셨던 마지막 세대....
가족을 위하여 일요일 날 특근도 서로하려고 했고, 간식으로 나오는 빵을 동생들
주려고 먹지 않고, 집으로 갖고 오던 공돌이 공순이 세대.....
열악한 단칸방 연탄 난방으로, 많은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은
마지막 연탄가스 절명 세대...
달랑 열차표만 들고 객지에 나와 첫날부터 잠잘 곳 못 찾아, 서울역과 시내 주변을
헤매던 출세를 위하여 무작정 대책 없이 고향을 떠난 시대...
공부 잘하고 머리가 명석해도 부모님께 대학 보내 달라고 조르지 못하고, 수출 산업단지
뒷골목 쪽방촌에서 방값 아끼려고 여러 명이 한 방에 같이 자취했던 마지막 쪽방 세대...
총알 쏟아지는 월남 전쟁터를 밥은 원없이 먹을 수 있다고 하면서, 살아서 돌아오면
논밭 서너 마지기 살 수 있다 하여, 겁없이 전쟁터 간 세대...
그렇게 벌어서 아들 딸은 전부 대학 졸업시키고, 이제 쉬는가 했지만
스스로 손자 손녀 돌보미로 살아가는 마지막 국줄 세대...
일평생 일해서 도시에 마련한 아파트 한 채 마저 자식들을 위해 팔고, 다시 궁핍했던
고향 마을로 낙향해서 다시 농사 짓다가 쓰러지면,
아들 며느리의 고급 외제 차에 실려 더 먼 요양원으로 가서, 매일 요양원 진입로
멍하니 바라보다가 언젠가는, 눈물로 세상을 떠나는 쓸쓸한
외톨이 노인으로 임종하는 세대...
우린 그런 세대를 말없이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 조정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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