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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미술의 최고 걸작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탐구

김정웅 2017. 10. 28. 12:02

불교 미술의 최고 걸작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탐구


- 국보78호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 )'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반가사유상 중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것으로 국보 제78호와

국보 제83호로 지정된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 )이다.

두 불상은 ‘한국 불교 미술의 양대 걸작’, ‘국보 중의 국보’라고 불리고 있다. 또 ‘한국의

미소’라고 불리면서 한국을 소개하는 책자의 표지 그림으로도 자주 사용되고 있다.


두 불상은 어느 것이 더 뛰어난지 서열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작품이다. 머리에

복잡한 모양의 장식이 있는 높은 관을 쓰고 있는 것이 국보 제78호이고, 연꽃잎 모양의 낮은

관을 쓰고 있는 것이 국보 제83호 이다.


국보 제78호는 높이가 80cm이고, 국보 제83호는 93.5cm 다. 크기나 모양은 조금씩 다르지만

두 불상은 비슷한 점이 많다. 반원을 그린 듯한 눈썹, 지그시 감은 눈, 오뚝한 코, 그리고

살며시 머금은 미소는 신비롭다. 또 허리가 잘록하게 들어가 아름다운 곡선을 만들어 내고

있고, 미끈한 팔은 경쾌한 느낌을 갖게 한다. 둘 다 전체적으로 매우 우아하면서 빈틈 없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빼어난 작품이다.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어느 시대에 어디에서 만들어졌는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고.

처음에는 신라의 불상이라고 알려졌지만 시간이 갈수록 백제의 불상이라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기도하다.


미륵이란 어떤 부처일까?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미륵불을 조각한 것이다. 미륵불은 석가모니가 죽은 후에

이 세상에 내려와 사람들을 구해 준다는 미래의 부처를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 시대부터 미륵에 대한 믿음이 커졌고, 미륵 부처상을 많이 만들었다.

전쟁이나 나쁜 관리들의 괴롭힘 때문에 힘들어했던 사람들은 미륵부처님이 괴로움과

어려움 속에서 자신을 구해 주기를 원했던 것이다.


국보 78호 :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 우리 나라 최초의 반가사유상

- 국적은 신라로 보는것이 통설

국보 78호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높이 가 80㎝로 국립중앙박물관. 의자에 앉아

왼발은 내리고, 오른발은 왼쪽 다리 위에 걸쳤으며, 오른쪽 팔꿈치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손가락을  뺨에 댄 채 명상에 잠긴 반가사유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보살이 쓰고 있는

보관은 태양과  초승달을 결합한 특이한 형식이다. 금동으로 만든 이러한 반가사유상은

삼국시대에 걸쳐 크게 유행하였는데  이것이 가장 최초의 예로 주목된다.






국보 83호 : 금동미륵반가사유상

- 정교함과 잔잔한 미소가 풍기는 불교조각품의 숭고미


사유하는 모습의 반가사유상은 생로병사를 고민하여 명상에 잠긴 싯다르타 태자의 모습에서

비롯된 것이다. (소장처: 국립중앙박물관)


반가사유상은 왼쪽 다리 무릎 위에 오른쪽 다리를 올린 이른바 반가(半跏)한 자세에 오른 뺨에

오른쪽 손가락을 살짝 대어 마치 사유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형식의 불상은

인간의 생로병사를 고민하여 명상에 잠긴 싯다르타태자의 모습에서 비롯된 것으로 인도의

간다라나 중국 남북조 시대의 불전(佛傳) 부조 중에서 종종 등장한다. 중국에서 반가사유상은

5~6세기에 주로 만들어졌으며, ‘태자상(太子像)’, ‘사유상(思惟像)’, ‘용수상(龍樹像)’

등의 명칭으로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는 6~7세기에 크게 유행하였으며, 일반적으로 미륵

(미래의 부처)으로 간주된다. 우리나라의 반가사유상은 이후 일본의 아스카, 하쿠호시대

반가사유상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국립중앙박물관과 네이버 자료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