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프랑스 지성계(知性界)를 언급하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두 인물이
바로 우파와 좌파를 대표 하며 수십 년간 치열한 이념 대결을 벌였던
레이몽 아롱(1905~1983)과 장 폴 사르트르(1905~1980)다.
이 두 사람은 프랑스 최고 명문인 고등사범학교(ENS) 동기생이자 반(反)나치
레지스탕스 동지였을 정도로 절친 사이였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좌파 대부 사르트르는 프랑스 사회에서 파문을 당했고
반면 적수였던 우파 대부 레이몽 아롱은 21세기 국민 사부(師父)로 추대됐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사르트르와 아롱 사이를 결정적으로 갈라서게 한 사건이
1950년의 6.25, 곧 한국전쟁이었다.
사르트르는 “남한 괴뢰도당이 북한을 침략했다”는
프랑스 공산당의 주장을 여과 없이 대변했다.
반면 아롱은 종군기자로 한국전에 뛰어들면서 ’르 휘가로‘의 칼럼을 통해 “6.25는
소련 공산당의 사주를 받은 김일성의 남침(南侵)‘이라면서 “북한이 남한을 침략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중대한 사건”이라고 북한을 규탄했다.
사르트르는 북한에 의한 남침이 사실로 확인되자 이젠 “남한과
미국이 남침을 유도했다”는 주장을 내놓았고,
한때 “6·25 전쟁은 한반도 통일전쟁”이라는 프랑스 극좌파
주장에 동조하기 까지 했다.
당시 좌파가 주도하던 프랑스 지성계는 남침을 주장하던 아롱을 “미 제국주의자의
주구(走狗)”라며 매도하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아롱은 더욱 더 자신의
분명한 소신을 밝혔지만 상당수 우파 지식인들은 좌파의 ‘낙인찍기’가
이어지자 아예 침묵하거나 회피하는 비겁함을 보여주었다.
이런 좌파적 분위기가 지배하던 그 시기에 공산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아롱이
낸 책이 바로 ‘지식인의 아편’이다.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 에서 ‘종교를 지식인의 아편’이라 규정한데 대해
“공산주의야말로 지식인의 아편”이라고 받아친 것이다.
아롱의 이러한 주장은 당시 사회 분위기로 보면
참으로 대단히 용기있는 행동이었다.
그런데 이런 압도적 분위기 속에서 아롱은 ‘지식인의 아편’이라는 책을 통해
반인권적인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좌파가 ‘진보’의 이름을 독점하고
민중에게 거짓 선전·선동을 일삼는 현실을 이렇게 개탄했다.
“‘역사적 변증법에 의해 필연적으로 도래하는 무산계급의 시대가 억압된
자들을 해방시킨다’는 공산주의 이론은 사이비 종교와 같다.
절대성을 강조하고 오류를 인정하지 않는 사상은 민중을 고난으로 이끌 뿐이다.
거대한 수용소 국가로 전락한 소련의 모습은 이를 대변한다.
진보라는 이름을 내세워 민중을 잘못된 길로 몰아세우는 좌파 지식인은
‘마르크스주의라는 아편’의 중독자다. 객관성, 보편성과
소통하지 못하는 사상은 억지요 고집일 뿐이다.”
아롱은 사회의 분열에 대해서도 이렇게 일갈했다.
“분열의 원인은 하나다. 소련이나 공산주의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친구나 동지, 형제간 에도 영원한 작별을 고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사르트르는 소련의 강제수용소를 부정하지 않았다. 카뮈는 제국주의의 식민지와
프랑코의 악을 공격했다. 이들의 차이점은 어디에 있을까? 최후의 단계에서
카뮈는 서방진영을 선택하고, 사르트르는 공산진영을 선택한 사실에 있다”
카뮈가 요절하자 바통을 받은 것이 아롱이었다.
아롱은 소련의 몰락도 예견했다. 오류를 인정하지 않는 마르크스주의의 치명적
결함이 거대한 소련을 침몰시킬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정치란 선과 악의 투쟁이 아니다. 미래와 과거의 투쟁은 더더욱 아니다.
좀 더 바람직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의 선택일 뿐이다. 정치와 이념을
선과 악의 투쟁으로,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다.
그런 점에서 마르크스주의는 실패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다.”
아롱은 또한 소련 체제의 야만성과 폭력성을 비호하는 좌파의 소위
‘진보적 폭력론’에 대해서도 날선 비판을 이어갔다.
“혁명의 완성을 위해 반혁명 세력에 대한 폭력을 용인해도 좋다는 진보적 폭력론은
도그마(dogma)에 빠진 좌파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새로운 미래’를 건설하기
위해 반문명적인 행위를 허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지성인 자격이 있는가.
소련이 자유를 갈망하는 헝가리 국민을 탱크로 짓밟은 것에서 무엇을 보았나.
무엇이 그들에게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인 자유와 인권에 눈 감게 만들었는가.
이념의 우상, 독선의 도그마에 빠진 탓이다.”
아롱은 더불어 좌파들이 “자유주의 시장경제는 자본주의 착취 도구”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도 이렇게 설명했다.
“ ‘능력에 따라 일하고, 욕망에 따라 배분받는다’는 선전은 허공의 유토피아에
불과하다. 인간의 열망으로 이뤄질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런 허구에 몰입할수록
‘모두가 잘사는 세상’이 아니라 ‘모두가 가난한 세상’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
좌파들은 어설픈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역사의 진실을 어지럽혀선 안 된다.
오류를 인정하지 못하고 다른 의견을 용인하지 못하는 폐쇄성은 전체주의로
귀결된다는 게 역사의 교훈이다. 선동적인 ‘진보팔이’로 젊은이들을 호도하는
것은 문명의 퇴보를 재촉하는 것이다. 인간의 자발성과 창의력을 키우는
자유주의와 시장경제가 인류 진보의 유일한 해결책이다.”
공산주의의 해체, “아롱이 옳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죽기 직전 극적인 화해를 한다.
그리고 2017년 7월 2일 사르트르가 1946년 창간했던 좌파신문
‘리베라시옹(해방일보)’이 대국민 사과를 했다.
아롱의 사상을 21세기에 꽃 피운 사람이 바로 지금 프랑스 대통령 마크롱이다.
프랑스내에서의 좌파의 몰락이 프랑스를 더욱 프랑스답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시대가 그렇게 흘러가는데 대한민국 사회는 아직도 1960년대의 프랑스 시대에
머물러 있다. 아직도 한국의 상당수 지식인들은 아롱이 말한 사회주의라는
‘아편’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이 불편한 진실을 어떻게 봐야 할까?
특히 아롱은 “오류를 인정하지 않는 마르크스주의의 치명적 결함이 거대한
소련을 침몰시킬 것”이라 예견했는데 지금 집권여당 민주당, 국회를 완전히 장악한
거대 공룡여당 민주당의 정치 행태를 보면서 왜 소련의 침몰이 연상되는 것일까?
뿐만 아니라 아롱이 ‘지식인의 아편’에서 지적한 구구절절 내용이 1960년대가
아닌 2020년의 대한민국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참담하기까지 하다.
진보와 보수라는 양 날개 비행이 필요한 시대라고 한다. 그러나 그 전제는 병들지
않는 진보와 보수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진보는 주사파 운동세력,
다시말해 종북 주사파가 지배하는 퇴행적 집단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바로 그들에게 레이몽 아롱이 사르트르에게 했던 경고를
지금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절대 착각해서는 안되는 것은 지금 우리나라의 좌파는 미테랑, 브란트 같은
선진형 사회당과는 그 색깔도, 지향하는 바도 다르다는 점이다.
그저 ‘주사파’일 뿐인 것이다.
프랑스의 좌파언론 ‘리베라시옹’은 이렇게 공산주의 사상에 물들여져
마르크스 이념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고대의 공룡들이 아직도
기어 다닌다”면서 규탄하며 경계했다.
속과 겉이 다른 한국의 좌파들이 갈수록 본색을 드러내고 있는 지금, 그들이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 벗어나 건전한 좌파를 추구한다면 대한민국도 마크롱
같은 대통령도 나오고, 건설적인 좌우파 대립을 하면서 또다시 대한민국을
도약대에 올려놓을 수 있지 않을까?
그때가 속히 도래하기를 간절히 기대해 본다.
(모셔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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