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아, 다녀간 지 열흘인디 고새 이리두 보고 잡다냐?
엄동설한에 밥은 잘 묵냐? 엄니는 자나 깨나 아들 걱정뿐이당...
엄니가 해준 '세한도 부적'일랑 꼬옥 속옷에 넣기라...”
부적으로 쓸만큼 세한도를 사랑한 한 어머니가 군에 간
아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새해를 시작하며 ‘세한도(歲寒圖.국보 제180호)’를 떠올렸습니다.
황량한 들판 위의 초라한 초가집, 한겨울에 의젓하게 서 있는 소나무
잣나무를 거칠게 그려넣은,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가 생각났습니다.
세한도는 추사의 심경이 그대로 살아있는 명작이지요. 갈필을 사용하고,
자연미와 고담한 멋스러움을 추상화해 수묵으로 그렸습니다.
그림엔 그의 ‘歲寒’이 담겼어요.
설 전후 혹독한 추위와 고난을 표징합니다.
‘눈이 와야 솔이 푸른 줄 안다’는 말처럼 삭풍한설 속에도 솔은 인고의
푸름을 드러냅니다. 추사는 왜 이리도 쓸쓸한 그림을 그렸을까?
추사는 안동김씨 세력에 의해 대역죄인이 되어 제주로 9년
유배를 당했지요. ‘위리안치형’이란 중형에 처해져...
고생을 모르고 지낸 추사에게 유배생활은 견디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끊임없이 풍토병에 시달리는 가운데도 칠십 평생에 벼루 열
개를 밑창내고 붓 천 개가 다 닳아 버릴 만큼
학문 정진을 쉬지 않았어요.
이 그림은 제주도 유배 5년째인 1844년 제자 이상적의
정의에 답례로 그린 것입니다.
주변에 들끓던 그 많은 사람 다 떠나고, 부인마저 세상을 뜨니
고립무원의 추사에게 한줄기 빛은 제자인 이상적뿐이었어요.
역관인 제자는 청나라에 갈 때마다 신간 서적과
학문 동향을 전했습니다.
권력에 의해 땅 끝까지 내쳐진 스승을 끝까지 따라준 제자였지요.
웬만한 정의로는 할 수 없는 일임을 안 추사가
자신의 심경을 글로 담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권력이 있을 때는 가까이 하다가
권세의 자리에서 물러나면 모른 척 하는 것인데,
내가 지금 절해고도에서 귀양살이를 하는 처량한
신세임에도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그
마음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 건가.
공자는 ‘추운 철이 돼서야 송백의 푸르름을 볼 수 있다’고 했으니
잘 살 때나 궁할 때나 한결같은 그대의 정이야 말로
세한송백(歲寒松柏)의 절조가 아니고 무엇이랴.❞
고서화 연구가 이용희 선생은 “세한도는 일견 퍽 싱거운 그림”이라 했고,
추사의 일생을 다룬 최초의 비평서인 ‘완당평전’을 낸 유홍준도
“실경산수로 치자면 0점짜리 그림“ 이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세한도를 추사 예술의 정수로 꼽는 데는 눈에 보인 아닌
사의(寫意), 즉 뜻을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그림, 글씨, 글 내용이 삼위일체를 이루어 값을 매길 수 없는
무가지보의 가치를 만들었죠.
세한도가 돌고 돌아 국민 품에 안기기까지
굴곡진 소장사(史)를 써야 했습니다.
세한도는 이상적이 죽은 뒤 추사 연구가인 경성제대 후지스카 지카시
교수의 소유가 돼 일본으로 갑니다.
이를 찾고자 서예가 소전 손재형이 거금을 들고 도쿄로 향했습니다.
태평양 전쟁으로 연합군의 공습이 계속되는 상황에서도 소전은
100일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후지스카를 찾아갑니다.
이에 감복한 후지스카가 “내가졌다”며
세한도를 무상으로 내주었습니다.
귀국해서도 세한도는 정착을 못했죠. 손재형이 정치를 하면서 자금이
딸리자 저당을 잡혔고, 결국 개성 갑부 손세기의 소유가 됩니다.
이후 대를 이어 소장해온 아들 손창근 씨가 얼마 전에
“자식보다 더 아낀 작품”이라는 세한도를 아무런
조건 없이 국가에 기증했습니다.
추사는 그림에 ‘장무상망(長毋相忘)’이란 인장을 찍었어요.
"오랜 세월 지나도 잊지 말자"는 뜻입니다.
살아있는 것은 모두 사라졌으나, 추사와 이상적의 정리와
의리는 세한에도 푸르름을 더합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영원히’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마음을
안으로 다스린 장무상망의 글귀가 심금에 와 닿습니다.
"우리 오래도록 잊지 말자." 우정도 사랑도 추운 겨울이 되면
밑천이 드러나는 법이죠.
나는 누구로부터 장무상망이란 말을 들을 수 있을까?
이를 돌아보게 하는 '세한도(歲寒圖)'...
지난 여름 과천추사박물관을 돌아본 뒤 혹시나 해 중앙박물관을
찾았으나 원본을 만나지 못했어요. 안식년이랍니다.
하지만 국립박물관이 국민 품으로 돌아온 것을 기리고자
곧 '세한도 특별전'을 열 것이라는 소식에
희망을 안고 발길을 돌렸지요.
- 이관순 소설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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